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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낡은 질서를 허물다 본문

영감

프랑스 혁명, 낡은 질서를 허물다

별보기hs 2009. 8. 10. 12:33


∙만날사람 : 로베스 피에르
∙가볼곳 : 바스티유 광장
∙주요사건 : 프랑스 혁명

“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 너희의 군대를 만들어라. 나아가자, 나아가자. 더러운 피를 물처럼 흐르게 하자!”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가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프랑스 인들은 왜 이렇게 살벌한 노래를 국가로 부르게 되었을까?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오늘까지 그 정치적 지위는 어떤 것이었는가? 제로다. 만약 특권계급이 명예와 이익이 있는 자리를 전부 새치기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대다수 공민에 대한 부정인 동시에 공무에 대한 반역이다.”―시에예스 Emmanuel-Joseph Sieyes

1789년 7월14일,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문이 열렸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정치적 탄압의 소굴로 알려진 바스티유 감옥이 프랑스 민중의 공격으로 무너진 것이다. 시민·노동자·농민·상인들로 구성된 제3신분의 국민의회를 루이 16세가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해산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가 3부회 회의장을 봉쇄하자 국민의회는 베르사유 궁의 테니스코트에 모여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테니스코트의 맹약’을 결의했다.

18세기 말의 프랑스를 일컫는 가장 적절한 말은 ‘총체적 파탄’일 것이다.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루이 14세의 17세기부터 이미 몰락의 조짐이 일고 있었다. 프랑스 민중이 아닌 왕과 귀족과 성직자들만의 전성기였기에 몰락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코 순수하지 않은 의도로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등 절대군주들은 수많은 전쟁에 막대한 전쟁비용을 쏟아부어 국고를 탕진했다. 그런데도 바닥난 국고를 채우는 일은 고스란히 제3신분이 떠안고 있었다.

극소수의 부유한 지배자가 다수의 민중을 통치하던 프랑스의 빈부격차는 더 이상 심해질 수 없을 지경으로 악화돼 있었다. 1%의 지배계급이 부를 독식하고 있는 게 프랑스의 18세기였던 것이다. 2700만 명의 인구 중 0.4%에 불과한 제1신분의 성직자들이 전 국토의 10%에 달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20만도 채 안 되는 제2신분의 귀족들 역시 20%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신분과 제2신분은 모든 세금을 면제받는 특혜를 누렸으며 그 모든 부담은 제3신분이 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총체적 난국 속에서도 베르사유의 화려한 파티는 연일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매주 한 번씩 열리는 회식 그랑 꾸베르(Grand Couvert)는 성실하게 지켜졌고, 매일 밤 벌어지는 호화찬란한 연회는 로마의 그것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그 사치의 선두에 ‘적자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무도회마다 새롭게 선보이는 화려한 드레스는 파리 귀부인들의 허영심을 자극했고 1미터나 되는 모자에 장식된 눈부신 보석과 주렁주렁 달린 온갖 과일들은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난국이 물려받은 유산이라고는 하나 루이 16세의 무기력한 통치도 프랑스의 파탄을 재촉하는 데 한몫을 했다. 무능한 왕은 낡고 병든 프랑스의 구태(앙시앵 레짐 Ancien Regime)를 혁신시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했던 유일한 정치는 무관심이요 그가 보인 유일한 능력은 식탐이었다. 무료하면 사냥을 했고 그것도 지치면 골방에 틀어박혀 자물쇠 만드는 취미에 골몰했다. 바스티유가 함락되던 그 날도 루이 16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저 따분한 일상에 지나지 않았다. 7월 14일자 왕의 일기는 ‘오늘도 아무 일 없음’이었다.

프랑스 민중은 왜 바스티유를 공격했는가? 폭군의 잔인한 압제로부터 신음하던 가족을 지키고 낡은 구체제를 허물어 자유를 얻는 영광의 날을 보려 함이 아니었던가?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누구인가? 십자가를 부여잡고 민중의 고혈로 배를 채운 성직자와, 권력을 틀어쥐고 민중의 혈세를 빨아먹던 귀족과, 자물쇠를 움켜쥐고 일상의 지루함에 하품하던 베르사유의 열쇠공이 아닌가? 그리하여 다시는 베르사유의 ‘황제 테니스’를 즐길 수 없게 된 자들이 진짜 배후가 아니었던가?

프랑스 인권 선언문
국민 의회로 모인 우리 프랑스 인민의 대표들은 인권에 대한 무지와 경시, 멸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 부패의 원인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이 엄숙한 선언을 통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는 신성한 권리가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기로 결의하였다. (중략) 그러므로 국민 의회는 절대자의 존재 앞에, 그리고 그 보호 아래 다음과 같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승인하고 선언한다.

∥인권선언, 그 이상과 현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 -인권선언 제1조
국민 의회는 혁명 정신을 ‘인권 선언’으로 정리하였다. 모든 사람은 무엇으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신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 압제에 저항할 권리도 명시되었다. 이런 생각은 특권 신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부르주아들의 ‘자유주의’를 현실화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중에서...
왜 프랑스 인권선언문을 읽는데, 계속 MB가 생각나는걸까 -_- 휴 답이 없는 이명박.......

더해서, 위의 그림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계단 중간에 걸려있던 그림이기도 했는데, 처음에 이 그림을 봤을 때 여자 가슴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는 걸 보고 얼마나 부끄러웠던지ㅎㅎㅎ 이후 중3때 역사선생님께서 그 그림이 얼마나 유명한 그림인지 아냐면서 여자 가슴에만 집중하지말라고고  말씀하셨었는데ㅋㅋㅋ 프랑스 7월 혁명을 상징하는 거라고 말씀해 주신 이후로는 이 그림이 좀 달라보였지.

-지식인 검색결과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들라크루아 그림 / Eugene Delacroix, 1798-1863년)  
(Liberty Leading the People / 불어제목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 그림이 완성되었던 1830년, 이 해 7월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납니다. 7월 혁명은 3일 동안 계속 되고, 8월 3일에 이르러 필립이 국왕에 즉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되었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낭만파 화가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데요,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대표작으로서 자유를 동경하는 낭만주의자의 이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 입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자유"에 대한 공감이 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에 있는데, 그녀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삼색기와 장총을 들고있는 이 여성은 마리안입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많은 상징물 중에는 삼색기와 마리안도 포함되는데요, 왜 여성이 자유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 쟁취해 낸 공화국이라는 단어가 여성형 명사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자유의 상징이 된 이 여인에게 마리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프랑스가 미국에 기증한 '자유의 여신상' 역시 마리안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중을 이끌고 전진을 외치는 여인의 순수함과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풍기는 잔인함이 극적 대조를 이루고, 깃발 뒤로 화염에 뒤덮인 도시와, 총칼을 들고 혁명의 행진을 계속하는 화면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반쯤 흘러내린 옷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합니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한편 죽은 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후면으로 피어오르는 안개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색채를 배경으로 삼아 밝게 빛나는 여신과 강렬한 대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혁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실제로 아르꼬르다리 부근에서 전투를 목격하고 펜으로 그린 데생을 남겼다고 합니다. '영광의 3일간' 에 감동한 그는 큰형 샤를 앙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국 프랑스가 승리하지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1830년 10월 18일) 고 쓰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