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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별보기hs 2019. 10. 26. 15:29

프랑수아즈 사강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고 매력적인 그녀의 삶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https://mybeauty.tistory.com/388)
그리고 오늘에서야 드디어 그녀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인 <슬픔이여 안녕>을 읽었다.
많은 이들이 극찬해 마지 않듯이 이 작품은 19살 소녀가 쓴 것이라 믿을 수 없을정도로 탁월했다.
문체, 심리묘사, 흡입력 있는 스토리 등등...
어느새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

주인공 '세실(이름마저 예쁘다)'은 당시 작가를 투영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세실은 이성보단 감정에 치우쳐 있고, 장기적인 성장 보단 잠깐의 쾌락을 좇는 캐릭터다. 마치 작가 본인의 삶처럼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화자가 19살 소녀인 것 같으면서도, 19살 소녀치곤 너무나도 적확하게 본인의 감정과 주변의 상황에 대해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19살 소녀가 아닌 것 처럼 느껴지곤 한다.
이 소설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내가 세실과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현재의 내가 '안'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안은 후에 세실의 예비 새엄마가 되는 인물로, 지적이고 고상한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로운 영혼에 감수성이 예민한 세실은 모든걸 통제하려하고 어느 수준 이상을 요구하는 안과 끊임없이 부딪힌다.
나는 초반엔 안에게 쉽게 감정이입을 했지만, 갈등이 본격화되는 중반부에선 어느새 안을 엄마에 빗대게 되었고 세실에 더 감정이입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느꼈다. 나는 원래 세실 같은 사람이었지만 엄마를 통해서 끊임없이 통제당하며 안 같은 사람이 되어왔구나.
내가 세실에 대해 다행스럽게 느꼈던 점은, 나는 매우 어린시절부터 엄마에게 훈육당해왔지만 세실은 자아정체성이 형성되고 난 17살 이후에 훈육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것을 위해 음모를 꾸밀줄이라도 알았다. 그것이 옳고그름을 떠나서..
이 소설에 안이 등장한 직후부터 나는 안이 INTJ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책장이 넘어갈수록 확신하게 되었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삶의 태도, 지적 욕구 및 수준높은 삶에 대한 욕구와 성취, 그렇지 못한 주변에 대한 낮은 포용력, 본인 기준에 맞지 않는 타인을 통제하려고 하는 습성. 이 모든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INTJ 특성과 일치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과 정반대의 성격인 세실을 이해했다. 만약 내가 10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장강명 작가의 말처럼 나도 세을 마냥 '나쁜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때에 비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의 어두운 감정에 관해서도 더 잘 알게 되었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간에 자의든 타의든 타인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극단의 감정인 '사랑'과 '미움'에 대해 이처럼 원초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 작품을 쓴 작가가 19살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할 것이다. 은 질투, 미움 등 본인의 복잡한 감정에서 비롯된 음모를 진행하면서도 끊임없이 죄책감과 도망가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이 소설에 묘사된 세의 감정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정도로 복잡다단하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 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소설의 힘이고 작가의 역량이다. 동시에 소설에서 묘사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이지 눈부시게 아름답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그라데이션 중에서 이 소설에서의 세실의 사랑은 (내가 최초로 아름답다고 느꼈던 백의 그림자에서의 사랑과는 다른 방식으로) 풋풋함에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가미된다. 서른이 넘고나서는 섹슈얼함을 천박하지 않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사강 스스로도 이 작품에 대해 평하기를 '관능과 순진함이 동일한 비중으로 섞여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두른 두 팔을 풀더니 나를 부드럽게 요트에서 끌어내렸다. 그는 나를 조금 들어 올려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얹은 뒤 꼭 끌어안았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아침 햇살 속에서 그는 나만큼이나 황금빛이었고 다정했으며 부드러웠다. 그는 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중략) 나는 행복이, 완벽한 편안함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항상 내가 글에서 환희를 발견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슬픔이여 안녕>도 제목과는 달리 내게 슬픔보단 환희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소설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도 내 글에서 환희를 발견할 수 있기를 항상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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