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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별보기hs 2016. 2. 18. 11:08

라이너 마리아 릴케 / (고독으로부터 찾는 해답)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번역 김재혁)


대학교 때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구입하게 된 책이다.

돌아보면 대학교 때는 이런 적이 많았다. 서점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어떤 종류의 도서관일 거라고 말했던 보르헤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 시절이 문득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이 문집은 프란츠 카푸스라는 당시 군사학교를 다니고 있던 시인 지망생이 유명한 문인이었던 릴케가 자신의 군사학교 선배라는 것을 알게되어, 그에게 자신의 습작시들을 평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정기적인 편지 왕래가 오고가게 된 것을 묶은 것이다.

시인과 군사학교라니 이렇게 안어울리는 조합이 있을 수 없다. 역시나 릴케는 군사학교를 자퇴한 후에 법학을 공부하라는 권유를 받고 프라하 대학 법률학부에 들어가지만, 이미 그때부터 자신의 길이 문학 쪽임을 깨닫고 그쪽으로 더욱 매진한다.

살펴보면 법학을 전공한 작가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다. 대충 생각나는 것만 써봐도 카프카, 성석제, 전혜린, 오규원... 다들 결국엔 글을 썼다.


이 짧은 편지모음은 최근에 읽은 수십 권의 책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다.

시인의 통찰은 감히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으며 문장은 참으로 강렬하고 아름답다.

훌륭한 번역에도 감사하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할 수 있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p12, 첫번째 편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p14, 첫번째 편지

이 세상의 맨 처음 사람처럼 말해보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소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의 편린들과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나름의 믿음 따위를 묘사하도록 해보십시오.

p15, 첫번째 편지

당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그 원천에 도달하여 당신이 꼭 창작을 해야하는지 물으십시오. 아마도 당신이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답이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운명을 받아들여, 그것을 짊어지십시오. 그 운명의 짐과 그 위대함을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바깥세계로부터 무슨 보상이 올까 하는 물음은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창조자는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고 자신과 한 몸이 된 자연에서 구해야 하니까요.

p17, 첫번째 편지

당신의 모든 성장과 발전을 조용하고도 진지하게 이어나가라는 것입니다.

p18, 첫번째 편지

어떤 다른 일에서보다도 특히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우리 인간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p22, 두번째 편지

당신의 가슴속에 풀리지 않은 채로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고 대하라는 것과 그 문제들 자체를 굳게 닫힌 방이나 지극히 낯선 말로 적힌 책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궁금한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십시오.

p40, 네번째 편지

성(性)은 우리에게 부여된 크고 무한한 경험이며, 세계에 대한 인식이며, 이러한 모든 인식의 충만이자 꽃봉오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쁜게 아닙니다. 오히려 나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경험을 오용하고 낭비하고 자신들의 삶의 따분한 곳을 긁어줄 자극 정도로나 생각하고 기분풀이 정도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p41, 네번째 편지

표면적인 것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깊은 곳에는 늘 법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밀을 그릇되게 그리고 나쁘게 살고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마치 봉인된 편지처럼 내용도 모르는 채 그냥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p44, 네번째 편지

세계의 위대한 개혁은, 아마도 남성과 여성이 모든 그릇된 감정과 혐오감에서 벗어나, 서로 반대되는 존재로서 상대를 찾지 말고 같은 형제자매로서, 이웃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연대하여 그들의 어깨에 부과된 어려운 성을 소박하고 끈기 있게 함께 짊어지고 나아가는 데 있을 것입니다.

p45, 네번째 편지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당신의 아름답게 울리는 비탄으로 견디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멀리 느껴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당신의 영역이 이미 별들 바로 밑에까지 다다를만큼 커졌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는 당신의 성장을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성장의 뒤쪽에 처져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십시오. 그리고 그들 앞에서 확실하고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하고, 당신의 의심으로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 것이며, 그들이 이해 못할 당신의 확신이나 기쁨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지도 마십시오. 당신 자신이 지금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 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을, 그들과의 어떤 소박하고 진실한 공통점을 당신이 먼저 찾으세요. 당신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사랑하고, 당신에겐 친근하기만 한 고독을 두려워하는 나이든 분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하세요.

pp45-6, 네번째 편지

우선은 당신에게 독립을, 어떠한 의미로든 당신에게 완전한 경제적 자립을 가능케 해주는 직업의 문턱에 당신이 들어섰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이 같은 직업의 굴레로 인해 당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의 삶이 제약을 느끼는지, 그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십시오. 나는 당신의 직업이 매우 힘들며 매우 까다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까닭은 그와 같은 직업에는 엄청난 무게의 인습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것의 문제점에 대해서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고독은 당신에게 아주 낯선 상황 속에서도 당신을 위한 의지처이자 고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당신의 모든 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소망들은 당신을 동행할 각오가 되어 있고, 나의 신뢰는 당신과 함께합니다.

pp46-7, 네번째 편지